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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박물학적 증명사진
황록주 | 미술평론가,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


박물관의 유물들은 극도로 절제된 조명 아래 드러나야 할 것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시간을 견뎌온 유물들이 앞으로도 후대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빛이 갖고 있는 물리적 여건 또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만큼 일정하게 차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빛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역사는 무한정 객관적일 수 없다. 누군가의 태도와 그것을 지지하는 다수의 권위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과감히 뒤덮은 채로 진리를 선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끔 바로 그 절제된 조명이 역사를 기록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 밝혀내지 못한 역사는 제한된 조명등 아래 어느 한 면을 집중하게 하고, 그 시선은 결국 누군가가 유인해내는 것이다. 박물관의 전시가 특히나 조명에 그토록 예민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역사는 결국 밝혀진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의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빛을 조절하는 것, 그것은 진실을 조절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당연히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무한한 밝음에서 또한 우리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사진은 시간과 빛의 예술이다. 빛의 세기에 따라 드러나는 시간의 섬세한 숨결이 사진 안에 가두어져 있다.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죽음을 유보해내려는 생의 충동이 사진을 발명해냈고, 사진은 찍는다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그 삶의 순간을 죽음 안에 가둔다. 사진 속에서 빛은 대상을 지나 그림자로 남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빛을 만나면 어둠을 만든다.

그녀의 사진 속에 담긴 대상들은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서 있거나 의자에 앉아 있는 등 단순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도 하고, 바느질이나 실뜨게를 한다거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거나 망원경을 들고 있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 간단한 동작을 보여주기도 한다. 함께 등장하는 소품과는 무관하게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간단한 행동을 드러내는 사진 한 장을 위해 작가는 조명을 비롯하여 소품, 동작, 자세, 시선처리에 이르는 모든 요소를 마치 조각가가 빚거나 깎아내는 작업을 하듯 섬세하게 재단해낸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한 순간 정지한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바니타스(vanitas)를 외치며 단단히 정지해있던 네덜란드의 정물화처럼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들이 진리(veritas)의 한 순간을 위해 죽음처럼 정지해 있다. 그러므로 성지연의 사진은 그 생의 충동과 죽음에의 충동 사이에 존재한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아주 단순한 행동을 보여주면서도 그 행위에서 벗어나 있다. 한 장의 사진 속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우리가 보는 장면의 바깥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정물처럼 견고하고 단단하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들의 정적인 행동은 적절히 조절된 빛 아래서 더도 덜도 아니게 드러나는 형태와 그림자에 따라 기록된 역사이며, 따라서 그녀의 사진 속에서 인물들이 드러나는 방식은 마치 박물관의 유물이 전시되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행위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행위 바깥을 끝없이 넘어가는 시선의 기록인 것이다. 분명 살아 있지만 박제된 것 같은 인물들이 정지해 있는 순간은 이미 그 시공간 너머의 것을 선취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그 한 켜를 들추어낼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기록한다. 그렇게라도 정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렇게라도 규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절대적인 고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들 거기 즈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의 절박함이 만들어내는 풍경인 것이다. 다 드러낼 수 없으며, 또한 모두 감춰버릴 수 없는 역사, 내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존재해야 한다는 불멸에의 강박이 만들어낸 인간의 역사는 거창한 권력이 아니라 개개인의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날카로운 칼을 들고 이것저것 재단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끝내 숨겨놓고 싶었던 상처를 들키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사소한 듯 가져다 놓은 그 몇 개의 소품들이 갖는 무게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머리 위에 얹어놓은 돌,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가린 가면, 무엇이 매달려 있는지 모를 밧줄이며, 사람의 형상을 꼭 닮은 인형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선택한 소품들은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설정한 상황 또한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할 지 모를 일들로 가득하다. 돌아서 벽을 바라보는 여인이 들고 있는 망원경은 아마도 그냥 바라보는 것보다 더 일그러진 풍경을 비추어낼 것이다. 쓸쓸히 고개를 떨군 채 뒤돌아 앉은 여인을 비추어내는 빛은 가뜩이나 무거운 어깨에 초첨을 맞추고 있다. 하루하루 입어야 살 수 있는 옷을 만드는 바늘은 당장에라도 가슴을 찌를 것 같은 비수처럼 느껴진다. 특히나 모델들의 시선처리는 보는 이를 괴롭힌다. 마우스를 잡고 있는 남자는 과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지, 물고기가 없는 어항을 앞에 둔 여인의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담긴 표정의 시선이 흘깃거리는 것은 무엇인지, 희고 검은 봉지를 양 손에 들고 있는 남자는 대체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 모호함의 풍경은 <하얀 새>와 <검은 리본>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비어있는 새장을 만지는 흰 옷의 여인이 바라보는 곳은 제목 속에 있는 ‘하얀 새’가 날아간 곳일까? 사라진 흰 새는 바로 그 여인이었던 것은 아닐까? 성별이 모호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여인의 목을 친친 감아놓은 검은 망사 리본이 상징하는 것은 삶일까, 아니면 죽음일까?

우리는 모두 빛과 어둠의 사이에 존재한다. 빛으로 드러난 곳이 있으면 어둠 속에 감춰지는 것이 있다. 빛 안에 있고 어둠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이에 있다. 그녀가 말하는 애매호모함이란 바로 그 간극, 엇나감, 비껴나간 시선, 차마 드러내지 못할 진실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지연의 사진은 인간 행동의 유물, 인간이라는 존재의 박물학적 증명사진이다. 삶 또한 죽음 안에 있으며, 사진의 존재양식은 그 사이에서 무수한 죽음을 유보해내는 순간의 단층을 이룬다. 저 쓸쓸한 풍경들은 무수한 형태로 계속해서 드러날 테지만, 빛은 끝없이 그녀의 선택에 따라 그림자를 만들어낼 것이다. 불멸에의 욕망은 허무하지만 그것이 또한 삶의 진리라는 것을, 저 예사롭지 않은 사진 한 장 한 장이 온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