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82) 10.5305.1470
jiyeon.sung@yahoo.com

Back 2 of 6 Previous | Next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필립 피게 | Art Critic, Curator
한국 문화원, 파리, 프랑스, 2006년



검은 복장에 머리를 풀어서 늘어뜨린 여인이 탁자에 팔꿈치를 괸 채 의자에 앉아있다. 양손으로 목 뒤를 받힌 자세로 그녀는 벽에 기대세운 거울을 보고있다. 공간은 비어있다. 완전히 빈 공간이다. 탁자 위에는 단지 머리빗과 안경이 놓여 있을 뿐이다. 벽에 맞닿은 탁자의 한 귀퉁이선 외에는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 거울을 그녀는 집요하게 응시한다. 작품의 제목은 “거울을 응시하는 여인”이다.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는 여인”이 아니다. 실재로 이 여인이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믿을 근거는 전혀 없다. 마치 어떠한 것의 반영도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듯.

성지연의 작품은 영원에 사로잡혀 멈추어버린 듯한 시간 속에 정지된 움직임을 보여주는 일련의 화면과 같다. 거울을 응시하는 여인은 그녀가 존재해온 모든 시간 동안 거울을 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한 인물은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앉은 채 헤드폰을 끼고 오직 한가지 동일한 음을 듣고 있는 듯 하다. 텅 빈 방 한 가운데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은 오직 한가지 자신만의 생각에 골몰한 듯 목적을 잃은 시선을 보여준다. 청바지와 소매를 걷어올린 검은색 폴로 티셔츠 차림으로 맨발로 서 있는 한 인물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어뜨린 채 어떤 결정적인 자세로 굳어버린 듯하다.

혼자인, 절대적으로 혼자인 인물들, 성지연의 사진에 담아내는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상태 속에 완벽히 흡인된 듯하다. 때로 인물에 대한 부연설명이 딸려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하나의 기능을 대변하는 인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전적으로 배제된 이들의 역할은 단 한가지, 그곳에 있다는 것뿐이다. 그들의 존재로 공간을 채우는 것. 시작도 결말도 없는, 각본 없는 나레이션으로 공간을 형용화하는 것. 그들이 누구이든, 작가가 그들을 어떤 상황아래로 상상했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들은 단지 연기자일뿐이며, 어떠한 체제도 통제하지 못하는 시간, 마치 심연처럼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시간 속의 단역일뿐이다.

작가는 그의 모델을 통해 인물의 직업이 무엇이며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다 보여 주고 싶어하지 않은다.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저 두 세가지 것이라고 한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A distance). 작가가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일면들이다. 개인적인 내면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일은 피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하나의 허구를 창조하고자 하며, 각자가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모델은 포즈를 취하고, 사진작가는 장면을 구성하며, 기계는 이를 기록한다. 또한 작가는 사진의 모델들의 의도적 포즈를 피하며 작업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폭력이나 연극성은 피하고자 하며, 치밀성과 근본주의 그리고 사용하는 수단의 경제성을 중시한다고 한다.

성지연의 작품은 시간과의 관계,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고정된 하나의 영상속에 영속화시키는 기술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예술은 사진의 본질에 대해서 성찰해보도록 한다. 그러나 한편, 시간과의 관계라는 동일한 문제에 있어서 그녀의 작품은 회화적 경험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일화적 요소를 배제하도록 이끌어주는 극도의 소박성을 선호하는 이 작가가 샤르뎅(Jean-Baptiste Chardin, 18세기 프랑스 정물화가)의 예술세계에 큰 관심을 둔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화는 내가 그저 해변만을 가까이한 섬과 같다” 라고 샤르뎅은 말하였다. 성지연이 자리잡기로 선택한 곳도 바로 주변, 가장자리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모두 주변에 대한 찬사와 같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곳, 혹은 거의 아무 것도 없는 곳. 여기서 섬에 대한 비유는 인적이 끊긴, 그러나 버림받지 않은 세계와 공명한다.

성지연의 작품의 뛰어난 점이라고 할 것은, 그녀의 작품이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마치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아무도 의심치 않는 희귀하고도 귀중한 장소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 천천히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보물은 첫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말레비치(Malevitch)와 클레인(Yves Klein) 이후로 익히 알려진 바처럼, 비어있음은 공허가 아니라 그 반대로 무한을 향한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비어있음은 단지 외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추상화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가장 극단적인 방식과 근접하는 현실의 여과 작업이 성지연의 작품구성 속에 여실히 드러난다는 사실로부터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한성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단색화면의 주된 사용, 직선의 효과, 재질의 효과, 그리고 빛의 높낮이 효과 등은 그녀의 미학적 선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심오함, 침묵 그리고 눈부심에 대한 탐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지연씨의 작품을 성격지우는 조형적 구성요소들을 넘어서, 그녀의 예술은 무한에 대한 욕구의 필연적 귀결과 다름아닌 어떤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

성지연의 스튜디오 한쪽 벽 위에는 영국화가 Whistler의 회화작품 사본이 한 장 걸려 있다. “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 Portrait of the painter’s mother”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1871년에 제작되었다. 검은 색과 다양한 회색만을 사용한 엄격한 분위기의 실내를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옆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휘슬러는 이 초상화를 급히 서둘러 그렸다. 이 통에 사전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캔버스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물감이 화폭에 스며들어 결과적으로 예상치 못한 강한 불투명 효과를 가져왔다.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자면 “불안하고 신비로운”, 거의 “달과 같은” 느낌을 작품에 더해주게 된 것이다. 성지연의 사진들은 강렬하다. 예술적 영향이나 맥락에서뿐 아니라, 일상성과 초시간성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상징적 차원에서 또한 강렬하다. 모델과 작가, 그리고 관객 사이에 서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